넉살 좋은 어느 투자 심사역님이 OOO 변호사, 공인회계사라고 적혀 있는 나의 명함을 보고, 대뜸 나를 변계사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카톡을 할 때도, 전화 통화를 할 때도, 만나서 대화할 때도... 그분 외에는 전부 나를 변호사라고 부르는데... 처음엔 듣도 보도 못한 변계사라고 불리는 게 어색하고 뭔가 변호사를 사칭한 이상한 직업 같아서 별로 였다. 그러나 말장난 같은 변계사라는 단어에 어려운 시험을 2개나 합격했다는 나름 존경(?)의 의미가 담겨있다는 걸 느끼고서 편안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때 나의 호칭은 '선생님'이었다. 공인회계사 시험을 합격하고 삼일회계법인에 입사를 했는데 모두들 나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당시 삼일회계법인에서는 이사, 상무 등 임원이 아닌 회계사는 전부 선생님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서로에게 배우고 서로를 존중하자는 의미였던 것 같다.
나는 나를 선생님으로 생각하지 않는데 다른 사람이 나를 선생님으로 부르는 게 어색하고 적응되지 않았다. 몇 년 동안 선생님이라고 불리면서 익숙해졌지만 뭔가 나답지 않다는, 나에게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계속 있었다. 그러다 다른 곳으로 이직해서 회계사라고 불렸을 때, 오히려 회계사라는 호칭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뭔가 불편했다.
단지 호칭 때문만은 아니지만, 늘 내 옷을 입은 것 같지 않은 불편함을 주었던 회계사를 그만두고, 사법시험을 봤다. 목표했던 검사는 최종 면접에서 '나이 때문에 떨어져도 속상해하지 말라'는 면접관의 말을 듣고 떨어졌다. 그리고 나는 변호사가 되었다. 로펌에서 변호사로 불리는 게 어색했다. 억울하고 뭔가 내가 선택한 길이 아니었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회계사처럼 나에게 맞지 않는 불편한 옷을 입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불편한 옷을 벗었다.
스타트업에 조인했다. 회계사로서 변호사로서 하지 않던 일들을 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를 여전히 변호사라고 불렀다. 나는 변호사가 아닌데...
그때 이후 나를 변호사라고 부르는 사람들보다 나를 변계사라고 부르는 심사역님이 더 편하게 느껴졌다. 명확한 정의가 있는 변호사보다는 누가 들으면 뭐지 하고 느낄 수 있는 변계사라는 호칭이 더 나답게 느껴졌다. 변호사와 회계사를 합친 말이지만 나에게는 변호사도 아닌 회계사도 아닌 제3의 무언가처럼 느껴졌다.
나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던 어느 날... 나답게 살아가는 게 어떤 걸까 고민하던 어느 날...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변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나이라는 장애물에 좌절하더라도 일단 도전하는 사람.
회계사가 되고 변호사가 되었지만, 회계사도 변호사도 아닌 또 다른 무언가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
변화를 계속하는 사람.
변. 계. 사.
그제서야 나는 나의 옷을 입은 듯한 편안함을 주는 타이틀을 발견했다.
변계사는 내가 나답게, 나 자신으로 존재한다는 증거다.
글을 쓰고 맞춤법 검사를 눌렀더니 '변계사'에 계속 빨간 줄이 생기면서 '변계 사'라고 띄어쓰기하라고 나온다. 정의되지 않았기에 내가 원하는 의미를 담을 수 있는 변계사라는 단어가 다시금 나답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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